|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도 탄압을 받았다. 장로교회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장로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 운동이 있은 뒤에 한국민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었다.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 주
목사와 신유의 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
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청년회전국연합회의 전신인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 >가 창립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4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였다. 신학노선의
갈등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그 해에 장로
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문을
닫았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그해에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와 함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이후에 1947년에
총회를 재건하 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 당의 지배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 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이북노회라 불리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던 1952년에 장로교회가
분열되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지역 인사들 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의 고려신학교
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을
분리하여 1952년 9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 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이렇게
교파분열이 시작되어 김재준목사를 비
롯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 (현재의 한신대학)의
신신학이 문제되어 1953년 6월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 분립하여 현재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되었다. 그 리고
전쟁이 끝난 뒤 1959년에는 제 44회
총회에서 신학교문제와 에큐메니칼운동
참여 문제 를 이유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합동)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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